환삼덩굴의 입장이 되어 말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는 없다. 환삼덩굴은 ‘목숨 가진 존재가 되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한다. ‘섞고 섞이며 사랑하는 일/끝의 끝까지 애써보는 일’이다.(환삼덩굴의 노래)
농부들에게 환삼덩굴은 징한 풀에 다름 아니다. 여름날 돌아보면 그새 무성해져 밭둑이나 집주변을 점령하고 있다. 예초기로 깎기도 품이 든다. 서로 얽히고설켜 섣불리 날을 가져다 댔다가는 엉키고 말려 번번이 손으로 풀어내야 한다. 시인은 이런 환삼덩굴에게서 지극한 사랑을 본다. 물론 환삼덩굴은 말하지 않는다. 환삼덩굴을 보고 떠올린 시인의 말일 뿐이다.
지금은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한다고 해맑게 말하는 작은 악들이 너무도 평범해진 세상’이다.(폴짝, 초원에서) 남 위에 서지 않으면 남 밑에 있을 수밖에 없단다, 웃으며 덕담 삼아 건네는 말들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초연결사회 안에서 고립된 개인으로 흩어져 도태의 책임은 각자에게 돌아간다. 뺏고 빼앗기는 구도 자체가 싫은 이들이 오히려 자신의 이상함을 고민한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공부를 통한 자각이든, 이어지는 불면과 우울의 밤이든, 우연찮은 만남이든 그런 순간은 온다. 관성적으로 머물러 온 세계가 실은 당연한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의식의 전환이 있더라도 한발 떼기는 쉽지 않다. 지금까지 살던 세계와 작별하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건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기막히게 즐거운 일일 수도 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던 사람과 만나 서로 위로를 나눌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물 밖 하늘은 비교할 수 없이 넓다. 시인의 귀여운 표현을 빌리면 ‘폴짝인’이 되는 것이다.(폴짝인입니까?) 고립된 우물 속에서 폴짝폴짝 뛰쳐나와서 다른 폴짝인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폴짝폴짝 뛴다. 누군가는 다시 다른 우물 속으로 들어가 버릴지 모르지만, 이미 세상 곳곳에 폴짝인들이 있다. 착취당하고 싶지 않고 착취하고 싶지도 않아 도시로부터 폴짝폴짝 뛰어 산골에서 최소한의 폭력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산골, 폴짝인들)
그럼 이제 생일이다. 다시 태어났으니까. 신나게 폴짝폴짝 뛰며 축하할 날이다. 다만 ‘배꼽에서 탯줄이 자라/엄마에게 닿을 때까지’ 뛰어야 한다.(축 생일) 모든 존재는 다른 생명-보통 엄마로 대변되는-에 빚을 진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한 생명이 죽으면, 사라지는 듯 보여도 자연의 물질 순환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형태를 달리할 뿐이다. 이런 인식 아래에서는 지금 부는 ‘이 바람이/지구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대기권 안에서 불던 바람이라 생각’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 사실의 진술일 뿐. ‘새로운 것이 실은 태곳적의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생일을 이해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게 된다. 대신 ‘끝 모를 정체를 가지’게 된다.(축 생일 2)
‘2023년 9월 9일 오전 3시 30분.’ 시인은 엄마의 사망 선고 시간을 ‘무한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엄마가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엄마가 떠나자 엄마가 많아’진 시인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엄마를 보며 인사하고 힘을 낸다.(여명) ‘지구와 탯줄로 연결된 달’은 ‘지구가 낳은/지구를 낳은/지구의 배꼽’이다.(달 봐요 파티) 시인에게 달의 인력에 따른 조수간만의 차는 달과 지구 사이 탯줄이 끊어지지 않아서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이별과 죽음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마지막이란 없다는 걸 알면서도/마지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애틋한 모순과 함께’한다.(여명) 쉽게 허무에 빠지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번 생, 인간의 모습으로 뭉쳐있게 됐는지 모르지만, ‘태어나면 죽고 마는 생의 법칙을/고귀하게 만드는 유일한 일’이 있다. 다시 ‘환삼덩굴의 노래’다. 섞고 섞이며 사랑하고 끝의 끝까지 애써보며 너와 나의 아픔/너와 나의 외로움/너와 나의 낭떠러지/섞고 섞인 우리 속에서/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해야 한다. 발견할 아름다움조차 야위어간다면/발명해내는 것이 나의 일이다.
그래, 시인은 제정신이 아니다. 들리지 않는 환삼덩굴의 노래를 대신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수는 없다. 그리고 시는 언제나 구체적인 해결책을 던져주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갑갑해 보이는 얘기가 태반이다.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그래도 어떤 힘이 있다고 한다면-이마저도 명확하지 않은 얘기지만-마음을 일깨운다. 마음이 일면,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넘어서야 할 벽들은 많고 다시 고립을 자처하게 될 수도 있지만, 옆에 ‘폴짝인’들이 있다. 한 번에 깨어지고 한 번에 벗어나게 되는 경우는 없다. 어울리고 응원하고 울고 얽히고설키고 스미면서 점차 다른 세계가 자연스러워지는 것뿐이다.
국가와 자본이 ‘천칭의 오른쪽에 황금 법전을 올리면/시인은 왼쪽에 장미 봉오리를 올’린다. ‘그딴 걸로는 턱도 없다고 만인이 비웃겠지만/시인은 시인의 일을’ 한다. (시인은 이쪽에 한 청년의 꽃잎을 놓을텐데) 법, 경전, 숫자, 신화의 언어 대신 ‘밥, 물, 공기, 피, 땀, 똥, 오줌, 씨앗의 말’을 대신하고자 한다.(한 마을의 시가 태어나는 자리)
나의 소비가, 내가 버는 돈이 어떤 착취에 기반한다면 그건 나의 잘못일까? 만약 인간 아닌 것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고려한다면? 정말 나의 잘못일까? 만약 그렇다면 내 잘못의 크기는? 정말 내 잘못도 있나? 세상이 그런 건데 어쩔 수 없지 않아? 산골서 농사짓는 건 도망 아냐? AI혁명, 기술패권, 국가경쟁력, 경제성장, 좋은 일자리 이쪽이 제일 시급한 거 아냐? 농사에 비전이 있어? 약한 것들 편애하는 마음이야 예쁘지만, 그래서 뭐? 뭐가 바뀌어? 나는 이제 누가 제정신인지 잘 모르겠다. 생일도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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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정신일까? - 홍주일보
환삼덩굴의 입장이 되어 말하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는 없다. 환삼덩굴은 ‘목숨 가진 존재가 되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한다. ‘섞고 섞이며 사랑하는 일/끝의 끝까지 애써보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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