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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당당] 변화를위한서평단 (2023~매주 서평 홍주일보 연재)

죽음을 배우다, 이예이 2026.03.19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존재의 ‘없음’을 상상할 수 있으면 그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는. 분명 옆에 있는데 없다고 가정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떠올려보긴 한다. 가족이나 친구, 이웃, 반려동물이 사라진 다음의 세상을, 그 빈자리를. 애틋해지고, 아까워지고, 먹먹해진다. 그래도 그 순간 뿐이다. 내 일상 속 그들의 자리는 견고하게만 보인다. 정말로 그들과 내가 언젠가 사라진다는 걸 깨닫는다면, 그 존재를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게나 무심히 대할 수 없게될 것이다.

로이 스크랜턴은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에서 기후위기 시대야말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을 지구적 차원에서 배울 때라고 말한다. 

우리 문명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이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세계는 여러 연구와 시도 중에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그 노력들이 결국은 실패할 것이라 주장하는 데 쓰였다. 지금 당장 지구 전체를 탈탄소화 해도 늦었지만, 애초에 탈탄소는 자본주의와는 양립할 수도 없는 길이다. “저렴한 주택, 생활 임금, 유급 병가, 자녀 돌봄 등의 자원을 갖는 것조차도 값싸고 효율적인 에너지에 의존”하기에 어떤 민주 정부도, 어떤 과두 정부도 자국의 경제에서 탄소 연료를 몰아내지 못할 것이다. ‘경제 성장’을 국력의 지표로 삼는 국가 간 탄소배출규약은 결코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탄소포집은 배출량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바람, 태양, 바이오매스 같은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은 분명 어떤 역할을 하겠지만 “세계 경제가 요구하는 규모로 공급”될 수는 없다. 공급량만 따지면 가장 ‘현실적’이라 꼽히는 원자력은 이미 그 위험성이 입증됐고, 핵폐기물 처리는 풀리지 않는 난제로만 남을 것이다. 결국은 친숙한 이 문명이 끝에 다다랐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로이 스크랜턴/ 시프/ 2023년 1월/ 15,000원
 
 
 

두려움 앞에서 인간 내면은 공포, 격분, 부정이 활성화된다. 개인의 ‘죽음’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들, 이를테면 증강인간, 뉴럴링크 신인류 프로젝트에서 보이는 어떤 광기가 문명의 종말 앞에서 “우주식민지,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 3D 프린터가 구현된 기술 유토피아에서 소비자로서 보내는 만족한 삶 등 상상 속의 내일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런 SF적인 상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두려움-투쟁 반응은 우리 일상에 만연해있다. 저자는 특히 온라인 생태계를 우려하는데, 기사 리트윗, 포스트 재공유, ‘좋아요’를 누르는 일조차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그 기술들은 중립적으로 설계되지 않았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동 반사적 결합, 민족주의, 공황, 전쟁, 바이럴 현상이 아니라, ‘생산’의 흐름을 방해하는 ‘춤’, 새로운 공명이라 믿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정치에도 꿀벌의 ‘춤’과 같은 ‘공명적 신호들’이 있다. 꿀벌 군체가 새집을 찾을 때면, 정찰 벌을 여러 마리 보낸다. 그들은 돌아와 남아 있던 벌에게 춤을 춘다. 정찰 벌들의 각 춤은 터전이 될 만한 서로 다른 장소들의 위치다. “하나하나의 춤은 제각기 다른 미래상을 제공한다. (…)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춤이 점점 인기를 얻게 되고, 마지막에 가서는 대부분의 벌이 그 춤을 춘다. 벌 떼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벌 떼는 비행을 시작한다.”

주류의 신호를 방해하는 일, 저자는 ‘정상’에서 벗어난 공명을 만들어내자고 말한다. 기후위기가 초래할 세계는 “지난 20만 년 동안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것이다.” 천년 뒤에도 인류가 살아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살아갈 세상엔 탄소-자본주의에 뿌리를 둔 우리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전혀 다른 신화, 전혀 다른 가치 체계가 요구될 것이다. “윤리학이나 정치학이든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종말에 대결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견해와 우리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우선순위에 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이전이나 이후에도, 인류사엔 다른 ‘춤’을 전파하려는 ‘인간 떼’들이 있었고, ‘주변’에 공존해왔고, 현재 지구 곳곳에도 있다. 죽음을 배우는 일은 그들의 신호에 공명하기 위한 선행 과제다. 자신을 “재전송의 채널을 강화”하는 “반사적 존재”로 내버려 두는 대신, 새로운 ‘춤’, 공명, 신호를 받아들이기 위한 “느낌을 재설정”하도록 자극에서 떨어져 ‘중단’하는 것. 

책을 덮고 나서도, 이 서평을 쓰는 동안에도 ‘죽음을 배운다’, ‘죽음을 실천한다’, 자극에서 떨어져 ‘중단’하라는 저자의 말들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이런 깨달음이 기후위기에서 인류를 어떤 종류의 구원으로 데려갈지도 역시 잘 모르겠다. 단지 다음의 두 문장이 정말로 좋았고, 곱씹으며 남은 날 동안 이해해보려는 참이다. (본문에 따로 떨어져 있던 두 문장을 이어서 인용, 뒤의 문장은 헤겔이 쓴 것이다)

“중단이란 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눈을 응시할 때, 우리는 이 밤을 응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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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다 - 홍주일보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존재의 ‘없음’을 상상할 수 있으면 그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는. 분명 옆에 있는데 없다고 가정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떠올려보긴 한다. 가족이나 친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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