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평평하게 다져진 땅 위에 가느다란 줄기를 가진 식물이 심긴 것 같아 보이는 글씨다. 모모모. 일정한 간격에 맞춰 심기고 있다. 모모모모모. 어린 벼가 축축한 흙에 줄지어 서서 뿌리 내리기 시작한다.(<모모모모모>, 밤코 작가, 향출판사, 2019)
논에 물이 들어찬다. 논에 물을 대는 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아직 모가 심기지 않아 잔잔한 물결이 이는 논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를 떠올리게 한다. 밤이면 달빛을 고요하게 끌어안던 빈 논의 주변이 동트는 새벽부터 어수선해진다. 논둑을 깎는 예초기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날이 지난다. 주황색 논장화를 무릎 위까지 끌어 올려 신은 노인이 아침, 저녁 구부정한 몸으로 논길을 오가던 날이 지난다. 장화에 갇힌 발에서 땀이 난다. 짧아진 옷에 드러난 손등과 팔뚝이 볕에 그을려 검게 변하고 있다. 땀을 식혀주던 바람이 점점 습기를 몰고 온다. 등을 온통 적신 땀을 말려주기는커녕 맞닿는 살결에 끈적함을 더한다. 해와 바람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달라졌다는 건, 한 달 전 파종한 볍씨가 불쑥 자랐으니 논으로 옮겨줘야 할 때가 왔다는 신호. 모판을 초록으로 가득 채운 어린 벼는 청량하고 늠름하다.
지난 6월 3일 <벼의 일년> 출판 기념회에 다녀왔다. 늦게 행사장에 도착했다. 가장 뒷편에 자리 잡고 앉아 둘러보니 도서관을 촘촘하게 채운 사람들이 꼭 논에 심긴 어린 벼 같다.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오도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일 년 동안 벼를 관찰하며 발견한 점을 설명한다. (책의 저자 오도 작가는 풀무학교의 농사 선생님이다.) 화면에는 벼의 단면을 찍은 사진이 띄워져 있다. 검은 종이 위에 벼를 올려놓은 사진에는 잎의 구조가 표시돼 있다. 늘 이 시기쯤, 같은 장소에, 비슷한 모습으로 심기는 벼는 하나의 풍경처럼 뭉뚱그려 보는 게 익숙한 식물이다. 그런 벼에게도 각 부분마다 이름이 있다.
벼의 잎은 잎집과 잎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부분에는 깃, 잎귀, 잎혀가 있다. 한층 더 확대한 사진으로 넘어간다. 깃, 잎귀, 잎혀가 강조되어 있다. 이 정도 확대로는 성에 차게 설명되지 않아 직접 손 그림을 그려 만든 자료를 띄운다. 마디마다 있는 단단한 깃, 깃과 잎집 사이에 좌우 한 쌍씩 구부러진 모습으로 있는 잎귀, 이름에서 보이다시피 혀를 낼름 내밀고 있는 것처럼 잎집의 끝에 비죽 솟은 얇은 막-잎혀. 내 신체 부위의 이름을 닮은 부분이 벼에게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나름 벼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오래 들여다봤을 때 알게 되는 세상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스크린 앞까지 바짝 다가가 이 작은 부위를 설명하던 오도 선생님이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라며 청중에게 질문한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여지없이 약하다. 속으로 대답했다. ‘엄청 신기해요….’ 특히나 잎귀는 벼와 닮은 식물인 ‘피’에는 없는 부분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강조한다. 김매기를 하다 헷갈릴 때면 이 잎귀(사진을 통해 한 번, 한층 더 가깝게 찍은 사진을 통해 또 한 번, 그걸로 모자라 손그림을 그려 확대한 그 부분)를 살펴보라는 꿀팁을 힘주어 전했다. 이 부분을 확인해서 김매기할 때 꼭 벼 아닌 피를 뽑아야 한다는 농사 학교 선생님다운 진중함이 섞인 발언에 청중은 푸흐흐, 푸쉬쉭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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