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관계의 집으로》를 읽으며 저자 최우용 건축가의 시선을 빌려 국내외 20여 곳의 건축을 살펴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의 시선에는 작은 것들과 사물의 이면을 살펴보는 따스함이 있었고 건축물의 시간과 공간이 가진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건축물의 시간에 따라 시대를 오가는 역사의 장면들이 펼쳐졌고, 그곳에 그런 모습의 건축물이 세워지게 된 연유를 담은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그의 시선을 빌려 홍성을 바라본다.
서울에 사는 친구가 아버지와 함께 내가 살고 있는 홍성에 처음으로 놀러왔다. 고향인 대구를 떠나 서울 잠실에 살고 있는 친구와 아버지는 홍성의 야트막한 산자락, 이제 막 모내기가 끝난 논과 잔잔한 밭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처음 와본 충청도의 지형을 신기해하며 편안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들의 시선은 수평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수평의 지형을 가진 홍성에도 수직으로 시선을 움직여야 하는 것들이 삐죽삐죽 솟아나고 있다. 27층 높이의 자이 아파트가 지어졌고, 지난 5월 오픈한 65m의 홍성스카이타워가 지어졌다. 그다음에는 20층의 이편한세상 아파트가 지어질 차례다. 그다음은 어떤 수직의 물체가 세워질까? 수직의 물체를 바라보는 것은 불편하다. 눈을 움직여보면 알 수 있다. 산을 바라볼 때처럼 완만하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꼬챙이처럼 바닥에서 솟아오른 수직의 무언가를 볼 때는 눈의 움직임이 불편하고 자연스럽지 않다.
남당항에 위치한 홍성스카이타워는 65m 높이에서 천수만 바다를 조망하게 돼 있다. 가슴이 뻥 뚫릴 듯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큰 매력이지만, 높은 곳에서 유리창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은 크고 선명한 텔레비전 화면 속 꽃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름없어 보인다. 높은 곳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공간에는 위계의 시선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보려는 욕구에서 만들어진 스카이타워에서 파놉티콘이 생각나는 건 우연일까?
홍성스카이타워에 흔히 붙는 수식어는 홍성의 새로운 ‘랜드마크’이다. ‘랜드마크’는 어떤 지역을 식별하는 데 목표물로써 적당한 사물을 뜻한다. 하지만 모든 지역에 복사하듯 만들어지고 있는 전망대는 홍성을 식별하는 데 적당한 사물일까? 최우용 건축가는 “랜드마크는 추상적인 두께와 시간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에 의해 랜드마크로써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만든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지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홍성의 진짜 랜드마크는 무엇일까. 홍성군민들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의미 있는 공간이 된 그곳이 어딜지 궁금하다.
최우용 건축가는 ‘건축가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사람의 ‘역사적 존재’로서 시대를 넘어서 있을 건축에 대한 책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참으로 단단하다. 그는 이일훈 건축가, 건축가이자 환경운동가인 훈데르트 바서의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건축적 관성에 대항하며 작은 것들을 살피는 그들의 책임을 이야기한다. 수많은 유명 건축물들을 건축한 시대의 건축가이지만 ‘자본과 권력에 눈을 감고’ 소름끼치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한 김수근 건축가의 명암을 모두 이야기한다. “건축과 도시를 도덕적으로 긴장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한 건축가의 책임감 있는 발언은 난립하고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모두에게 울림을 준다.
서울을 48분 만에 오갈 수 있는 새로운 전철 노선이 생기고 브랜드 아파트가 우후죽순 들어서는 홍성은 도덕적으로 긴장감이 있는 도시인가? 살만한 곳이 돼가고 있는가? 마구 달려가는 기차를 잠시 세우고 숨을 고르며 돌아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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