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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식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보고 나서 - 문수영 당원

내가 처음 돼지를 본 기억은 아주 어릴 적, 시골에 있던 할아버지 댁에서 돼지를 잡을 때였다. 동네 어르신들이 다 나와서 손에 연장 하나씩을 들고 돼지를 잡던 기억. 차마 죽이는 과정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던 건지 엄마가 눈을 가려서 다 보진 못했지만, 우물가 옆에 돼지가 피를 흘리며 죽어있던 것을 보았다. 마을에는 큰 잔칫날처럼 마을 사람들 모두 둘러앉아 갓 잡은 돼지를 고기로 썰어서 서로 돌려가며 나누어먹던 그 순간이 내 기억의 끝이다. 이상하게도 살아있는 돼지를 보기도 전에 죽은 돼지를 먼저 보았다.

 

십여 년이 흘러서 나는 진짜 살아있는 돼지를 만났다. 아직은 작은 새끼 돼지였던 그 아이는 다른 돼지들과 훌쩍 떨어져 길가에 남겨져있었고, 어떤 선생님이 우연히 발견해서 데리고 오셨다. 그 날부터 새끼 돼지의 이름은 복만이가 되었다. 우리 학교에는 소를 돌보는 축사당번이 있었는데, 소 집 옆에 복만이의 집을 만들어 축사당번이 돌아가며 소와 돼지를 함께 돌보기 시작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복만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느새 새끼 돼지에서 몸집이 큰 돼지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돼지 잡기 실습이 잡혔다. 복만이가 죽었다. 아니, 복만이를 죽였다. 털을 벗기는 그 순간에 이곳에는 복만이가 없다는 것을, 그 몸은 그저 한때 복만이로 불렸던 고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나는 먹었다.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고기를 못 먹거나 싫어하지는 않기에. 더군다나 고기를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우리가 잡았으니까, 먹기 위해서 잡아버린 거니까 책임을 지고 감당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진짜 내가 먹는 것에 대해 오롯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본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영화에서 또 다른 복만이를 만났다. 구제역 살처분 이후 공장식 축산의 문제를 인식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소규모 농장에서 길러지는 돼지들을 만나러 간 황윤 감독의 시선을 따라 나도 그 농장 안에서 복만이의 친구 같은 십순이, 점순이, 돈수 등 여러 돼지들을 보았다. 복만이와 똑같이 흙을 파는 것을 좋아하고, 코를 씰룩거리며 활기차게 밥을 먹는 돼지들이었다. 특히 새끼를 밴 십순이가 밤낮으로 쌕쌕 숨을 몰아쉬며 작은 생명을 낳는 모습은 아직은 내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신기한 순간이었다. 고요하고 긴 시간 동안 차례차례 나온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는 십순이를 통해 우리 엄마를 보고, 세상에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동물들을 보았다. , 직접 농사를 지어 만든 사료로 돼지들을 먹이고, 집집마다 지푸라기를 정성스레 깔아주고, 제철에 나는 풀들로 보양식을 해주며 돼지들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주인아저씨의 모습에 마음이 뭉클해져왔다. 오직 사람이 먹기 위해 키우는 돼지들과 달리 이곳은 생명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소규모 농장에서도 돼지들은 팔려갔다. 십순이가 낳은 돈수가 도축장으로 가는 트럭에 태워지는 장면은 공장식 축산이든 소규모 농장이든 키워지는 방법, 장소, 가치에 상관없이 돼지들의 고통은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것, 그 고통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아프게 짓눌렀다.

 

우리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내 먹을 거리를 책임질 수 있을까? 오늘 점심에 나온 고기반찬을 나는 어김없이 또 먹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나. 아마 고기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굳이 찾아 먹지는 않더라도,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그런 식사의 반복들. 언제부턴가 우리 식탁에는 고기가 늘 있어왔고, 그냥 계속 그렇게 먹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상 속에서 하나의 습관처럼 고기를 먹지만, 그 고기가 어떤 사연으로 우리의 식탁까지 올라오게 되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고기를 먹으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축산업 피해동물들의 삶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단순히 오늘 뭐 먹지?’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음식으로 식탁을 차릴까?’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안다면, 함부로 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 음식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들만 먹는다면, 육식으로 뒤범벅된 우리의 식문화가 달라질 것 같다. 공장식 축산의 대안은 소규모 농장이 아니다. 핵발전소의 대안이 대안에너지가 아니듯이. 음식, , 전기 일상에서 먹고, 자고, 삶을 영위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행위들이 모두 소비로 시작되는 이 문화를 바꿔야 대량생산 체계를 무찌를 수 있지 않을까. 황윤 감독의 말처럼 가장 가까운 나의 일상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