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밖으로, 현실 속으로
(이 제목은 영화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가져왔습니다)
김은희 홍성녹색당 운영위원
지난 3월 24일 일요일 오후 동네 마실방 ‘뜰’에서 영화를 보았다. 좋은 영화여도 상업적이지 않아서 홍성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영화였다. 마을 사람 몇몇의 노력으로 좋은 영화를 보았다. ‘나의 올드 오크’
2019년 3월 문재인 정부가 예고 없이 미세먼지 저감 조치로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조기폐쇄를 결정했다. 같은 해 10월 충남도는 ‘탈석탄 기후변화 대응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동아시아 중앙·지방 정부 통틀어 처음으로 ‘기후 비상상황’을 선포했다. 정부의 결정대로 2020년 12월 보령화력발전소 1,2호기가 조기 폐쇄되었다. 석탄화력발전소로 대표되던 화석연료의 시대는 끝나고 미세먼지도 없고, 탄소 배출도 적은 깨끗한, 대안 에너지의 시대가 시작되는 듯 했다. 보령, 태안, 당진으로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녹색당도 ‘기후악당 석탄화력 발전을 중단하라’며 기자회견도 하고, 구호도 외치고, 행진도 했었다. 우리의 요구대로 되었나? 전국의 석탄화력발전소 59기 중 절반 29기가 충남도에 있다.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서 2036년까지 폐쇄되는 석탄발전소 28기 중 14기가 충남도에 있다. 태안 1~6호기, 당진 1~6호기, 보령 5,6호기이다. 정부의 계획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폐쇄될 것이다. 우리가 쟁취한 승리인가?
2019년 정부에서 당초 예상보다 17개월이나 이르게 보령 1,2호기를 폐쇄한다고 했을 때, 발전소가 직장이었던 노동자들, 발전노조는 “문재인 대통령의 미세먼지 대책을 환영한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끄는 ‘산업역군’이었다가 ‘기후악당’으로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고,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내가 발 딛고 있는 기반이 곤두박질치는 시간을 살고 있는 발전노동자들이, 이해한다고 환영한다고 말한다.
‘나의 올드 오크’ 영화 속 주인공과 친구들은 암흑 같은 지하에서 석탄을 채굴하던 광부였다. 영화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석탄은 영국을 산업혁명의 나라,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탄광산업의 쇠퇴, 탄광폐쇄를 두고 일어난 노동자 파업 속에서의 배신과 좌절을 거치면서 광부들은 탄광의 어둠 속에서 빛나던 ‘자존감’을 잃었다. 자잘하게 화를 내고 무관심해졌으며, 내전을 피해 이웃으로 온 시리아 난민들에게 비아냥댄다. 정든 술집에 모여 친구들과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그들은 스스로를 약자로 여겼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수익이 나지 않는 탄광을 폐쇄하려는 자본과 당시 수상이던 마가렛 대처 정부라는 거대 적에게 패한 것 같은 약자 처지라고. 전쟁을 피해서 무작정 집을 떠나, 식구들 중 누군가를 남겨두고 버스에 실려 이 마을에 떨어진 시리아 난민이라는 더 약한 자들과 마주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편안한 집, 무사한 식구들을 고마워하지 않는다. 난민을 돕지 않는다.
다수가 난민을 혐오하고 배척해도 올드 오크 술집 주인과 몇몇은 발로 뛰면서 동네 난민을 돌보고, ‘함께 먹고 더 단단해지기 위해’ 원주민과 이주민이 음식을 나누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공간과 시간을 만든다. 오해와 음모로 음식을 나누던 큰방을 못 쓰게 되었고, 주인공과 소수의 선의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족을 잃은 시리아 난민 가정에 애도하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찾아오는 뒷부분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태안, 당진, 보령의 화력발전소의 거대한 건물과 굴뚝, 연기는 눈에 보였지만, 그곳을 일터로 노동하면서 삶을 꾸려가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폐쇄 계획에, 폐쇄 과정이나 이후 발생하게 될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자리 어디에서도 발전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묻지 않았다. 정부는 직업 전환을 위한 교육과 직업 소개를 해준다면서 일자리를 다시 찾아보라는 것을 정책이라며 내놓고 있지만, 평생 그 일을 해온 사람에게 그게 쉬운 일인가. 거기다 새 일자리를 구하면 오랜 삶의 터전이었던, 발전소가 있던 지역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일하고 살아야 한다. 가족이 있다면 가족구성원 전부가 삶의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데 그게 쉬운가 말이다. 나라를 움직이는 필수재인 전기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험한 일을 하는 발전노동자가 기후악당일 수 없다. 게다가 발전소 노동자와 가족이 떠난 후의 태안, 당진, 보령은 어떤 도시가 될까. 발전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상인들과 관련 협력업체 등등은 어떻게 될까.
‘나의 올드 오크’는 ‘용기·연대·저항’이 쓰인 깃발을 들고 주인공과 친구들이 광부축제에 참가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너무 뻔한 교훈이지만 약자가 하나 되는 세상에 대한 상상은 늘 뭉클하다. 석탄화력발전소 노동자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삶을 뿌리째 뽑혀 모국에서도 난민처럼 떠돌지 않도록, 모여서 강해질 수 있도록 330 충남노동자 행진을 위해 태안에 모여주기를 바란다. 영화 속 인물들이 애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모여드는 것처럼, 우리는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서 모일 것이다. 태안 발전노동자들이 우리에게 잡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아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 태안에서 말한다. “석탄발전은 멈춰도, 우리의 삶은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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