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면 개월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당원을 만났습니다.
금창영 당원은 2007년 귀농해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금창영 당원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 본 인터뷰는 지난 5월 27일 진행되었습니다 )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현재 귀농운동본부 대표, 씨앗도서관 관장, 정농회 이사, 자연재배협동조합 이사를 맡고 있는 금창영입니다. 귀농 전에는 역사연구를 했고 2007년 홍성군 홍동면으로 귀농했습니다. 큰 애가 고2, 작은 애가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어떻게 귀농하게 되셨나요?
내가 있던 역사연구소에서 ‘역사와 산’이라는 모임을 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이 풀무전공부 학생이었습니다. 그분들을 통해 홍성군 홍동면에 몇 번 놀러 왔는데 그즈음 몸도 마음도 안 좋아서 1년 정도 요양하러 왔었습니다. 올 때는 귀농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공이 조선후기 농민운동사였는데 농업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습니다.
홍동에 오니 주변에서 대부분 농사짓지 말라하고 저도 농사지을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남는 땅을 부쳐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하던 일들은 하는대로 성과가 있었는데 농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포기할 생각을 하니 오기가 생겼습니다.
제가 홍동에 왔던 때는 논 김매기를 우렁이로 하기 전이라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으면 대부분 논과 밭을 합쳐 7,8천 평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농사지어봐야 수익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농한 선배들이 농사면적을 늘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부부 중 한 명은 농사를 짓고 다른 한 명은 취직해서 돈을 벌어왔습니다. 근데 이게 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넓은 면적을 혼자 농사짓고 집에 들어와서 혼자 밥해 먹는 게 행복하지 않잖아요. 그게 2011년, 2012년 즈음이에요. 후계농이 들어와 대단위로 농사를 지으니 농지는 줄고 농사지어 생협에 내도 생활유지가 안 됐어요.
왜 유기농 농사를 지어도 생활유지가 힘들었나요?
초기 유기농 농산물은 관행농산물 가격의 2,3배 정도를 받아 괜찮았어요. 근데 유기농 생산자가 많아지고 아이쿱생협이 최저가 정책을 내놓았어요. 친환경이 장려되면서 관행적 유기농도 늘어났어요. 그러니 유기농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농민들은 생활유지가 어려워졌어요.
제가 첫 해 농사짓던 밭에는 비닐이 많았어요. 봄 내내 비닐을 걷으며 ‘비닐은 쓰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홍성유기농 조합원이 되어 홍성유기농에 농산물을 냈어요. 비닐을 안 써서 수확량은 떨어졌는데 가격은 제대로 못받으니 억울하단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1년 반 뒤에 꾸러미를 시작했습니다. 꾸러미가 흔치않을 때라 꾸러미하면 좀 더 친환경적인 거 같고 새로웠어요. 또 더 싸고. 그래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어요. 그때 꾸러미를 받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많이 보낼 때는 한 주에 60박스를 보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10박스 내외로 보내고 있어요. 꾸러미를 한 지 3,4년 되었을 때는 돈도 많이 벌었어요. 꾸러미에 내가 물품을 다 못 채울 때는 물품을 사서 채우기도 했어요. 이웃할머니가 못 파는 농산물을 내가 팔아드린다고 자위하기도 했지만 유통업자가 된 것 같아 개운치 않았습니다. 돈은 벌었지만 일이 고되고 행복하지 않았어요. 청경우독의 여유로운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요.
5~6년차가 되니 이런 방식의 농사가 재미없어졌어요. 처음 농사를 지을 때는 감자꽃만 봐도 감탄했었는데 농사가 공식처럼 되니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다 6년 째 농사가 잘 안 됐는데 주변에서 이즈음 한 번 그런다더군요. 농부가 농사에 흥미가 떨어지면 그런다고. 농사에 대해서 다시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기계가 안들어가서 거름주기도 어려운 밭에서도 농사를 지었는데 ‘유박이나 거름 안 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거름 안 넣고 땅 갈지 않는 자연재배를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판매는 꾸러미로 하니 B급, C급이 나와도 다 팔 수 있었어요. 판로가 안정적이어서 자연재배에 대한 고민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그즈음 귀농, 귀촌 교육이 늘면서 시골, 귀농에 대한 정보가 많아졌습니다. 2014년, 2015년 즈음에 가족단위 귀농인구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1인 귀농인구가 늘었어요. 유기농하는 사람도 넓은 면적에 단일작물을 대량으로 심고 한 두 사람이 대부분의 경작지에 농사를 지었어요. 그래서 농사를 지으러 온 친구들이 농사 지을 땅은 좁아졌어요. 그래서 좁은 면적에서도 높은 수익이 가능한 자연재배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2014년에 준비를 시작해서 2015년에 자연재배 협동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2015년 일본 가와구치 농장을 다녀와서 자연재배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 같고, 2016년 자연재배 논농사를 시작해 2020년 자연농학교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농사에 대한 생각이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 것 같습니다.
이제 녹색당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금창영 선생님은 언제, 어떻게 녹색당에 입당하게 되었나요?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당 활동을 활발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집사람이 ‘청년진보당’ 활동을 할 때에 나도 처음으로 당 활동을 했었어요. 활동이랄 건 없고 당비를 내는 정도였습니다. 홍동에 올 때 그 당은 정리를 했어요.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터지고 후쿠시마에서 양배추 농사를 짓던 애농회 회원이 자살했대요. 그 얘기를 듣고 내가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불가항력적인 일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것과 관련된 발언이 조직적으로 일어나야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녹색당 창당할 즈음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10년 넘게 농사를 지어 오셨는데 이런 농업 정책은 말도 안 돼, 이런 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으신가요?
저는 농업과 농촌 문제가 농촌에 남아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이 농사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긍심이 없다는 데서 온다고 봅니다. 도시로 가야 성공한 것이니 자녀들을 도시로 보내고 집과 농지는 당신이 돌아가면 도시의 자녀가 재산으로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도시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자녀는 실패자로 봅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소득이 높아져도 농업과 농촌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입안과 결정이 당사자의 필요와 논리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농촌과 농업은 지원의 대상일 뿐이죠. 정책입안자들이 농업의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외국의 사례를 가져와 일방적으로 적용하고 A마을에서 성공하면 B,C 마을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각 마을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지요. 행정가나 연구자의 실적을 위해서 정책이 만들어지고 이 과정에서 농업, 농민은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컨설팅 세상’이에요. 예산이 늘어나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농민 스스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이에 대한 예산지원을 정부, 지자체에서 해주면 좋지요. 그런데 농민은 하려는 의지가 없는데 대규모 예산이 들어오니 마을에 분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사회적농업, 환경보전프로그램, 공익형직불금과 같은 새로운 정책과 제도들이 농민을 교화, 지도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농촌과 농업에 대한 사전적인 이해만 있거나 그도 없는 사람들이 농민의 원망과 요구를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쉽게 대규모 예산을 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정책입안자들은 몇몇 대농들만 농사를 지어 농업이 경쟁력있는 산업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대로 노력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습니다. 경쟁논리로 돌아가는 농업이 계속 실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지 않는 것은 위정자들이 시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진 기존체계로는 시골을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부심이 없는 농민과 농업을 모르는 위정자들이 만나면 틀 자체의 변화가 없고 농민, 농촌은 항상 대상화 되겠죠.
이런 흐름을 바꾸는데 녹색당이 역할을 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언젠가는 그런 역할을 해야죠.
2,3년 전 홍동에 강연이 붐처럼 일었다가 지금은 잠잠합니다. 강연은 강연으로 끝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각성한 인간들이 조직화하고 확장되어야 지역이 변하는 것인데, 그런 노력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냥 강연 듣고 끝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발언하는 게 중요합니다. 제가 마을학회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봤을 때 우리는 분석틀이 미흡하고 최신 이론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현장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실제 종자를 보지 않고도 종자관리사자격증을 딸 수 있고, 현장을 몰라도 시험만 잘 보면 능력있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 근대문명입니다. 하지만 시골은 그런 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근대문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생태문명이 나올 수 있는 전조가 있는 곳이 시골입니다. 이곳에서 녹색당이 변화의 촉진제 역할을 해야겠죠.
금창영 당원은 녹색당이 어떻게 활동하길 바라나요?
일본에 '타베루 통신'이라는 잡지가 있어요. '타베루 통신'은 잡지의 특집호에 실린 농산물을 같이 줍니다. 예를 들어 한 농부의 감자가 특집이면 그 잡지를 보면서 그 농부의 감자를 먹고 그 농부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죠. 이렇게도 농산물을 유통합니다. 일본의 '타베루 통신'이나 유럽의 ‘푸드 어셈블리’를 보면 내가 기존의 유통체계에서 한발도 떨어지지 못하고 유통을 고민하고 있구나, 그래서 이런 방식을 생각하지 못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 활동이나 운동이 잘 조직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낯설더라도 우리가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뭔가 다른 방식들을 찾아야하지 않나 싶어요.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익숙한 방식보다는, 많이 모이고 큰 힘을 내는 것보다는, 즐겁고 전환이 될 수 있는 재미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지 않을까합니다.
기후위기와 관련해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공유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농사짓는 내가 기후위기와 관련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툰베리가 1인 시위를 할 때 담임선생님이 옆에서 같이 시위를 했다고 하는데 멋있는 지지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비록 지지편지나 후원금을 보내지 않더라도 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연대를 할 수 있는 방법,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서 바꿔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타인을 바꾸고 조직화하는 방식이 이제 맞지 않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막스, 레닌주의자들이 노동자를 조직하고 혁명을 하는 방식이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그 방법을 고수하고 있는 것 아닌가합니다.
마지막으로 ‘홍성녹색당’으로 오행시를 지어주세요.
홍, 홍삼은 6년근으로 만든다
성, 성인이 되자면 20년이 되어야 한다.
녹, 녹색당이
색, 색깔을 분명히 하고 열심히 하다보면
당, 당연히 빛을 볼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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