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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 인터뷰: 찾아가는 녹색수다방 (2018~2019)

당원인터뷰 15 - 장길섭 당원 (2020-07-05)

사진제공_ 박혜정 당원

장길섭 당원은 1998년 홍성으로 귀농,

2000년부터 2018년까지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농업교사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문당리 동곡마을 이장님으로 활동하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7월 2일에 진행되었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를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요. 나이는 육십(용케 오래도 살았다!), 이젠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농부, 노인들만 사는 마을의 이장?

 

장길섭 당원은 홍성에서는 귀농 1세대로 소개되곤 하는데요. 처음 귀농을 결심하셨던 이유는 뭔가요.

녹색평론이 1991년도에 창간됐어요. 저는 편집자로 창간작업을 했지만 무엇보다 잡지에 실린 글을 제일 먼저 접하는 독자로서 일반 독자들보다 더 여러번 반복해서 같은 글을 읽었어요. 수십 번 읽다 보니 글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절실하게 느껴졌어요. 순환적인 농업 중심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녹색평론이 전하려는 메시지였는데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었죠. 그래서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마음먹고 나서도 쉽지는 않았지만요.

 

90년대 초에는 지금보다 귀농이 더 어려운 선택이었을 텐데요.

그렇죠. ‘귀농운동본부처럼 귀농자들을 지원하는 단체도 없었으니까요.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농인구는 매년 60만 명이 넘었어요. 농민 수는 계속 줄고 농촌은 피폐해지고 도시도 인구 과밀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죠.

95년 즈음 농민단체, 시민단체, 환경단체가 모여서 귀농운동본부를 만들자고 의기투합이 됐어요. 처음 발의한 사람은 농민운동을 오래 해왔던 이병철 씨예요. 일제 식민시대에 일어났던 브나로드 운동처럼 귀농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죠.

저는 당시 귀농자였고, 정농회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인구 절반이 농민이 되어야 생태계가 안정된다는 녹색평론의 메시지와도 닿아있었기 때문에 모른 체하기란 어려웠어요. 96년에 귀농학교를 우선 열자고 내가 제안해서 3개 단체 실무자들이 모여서 교육 프로그램을 짰어요. 강사 대부분은 정농회 안의 중견 농부들과 녹색평론에서 일하며 필자로 만났던 사람들이었고요. 귀농학교를 먼저 시작 한 후에 곧 귀농운동본부를 창립했지요.

 

귀농초기는 어땠나요?

1993년에 경기도 양주에 있던 풀무원 농장에 들어갔어요. 집도, 땅도, 농사기술도 없었죠. 그곳에서 1년을 지내보니 대충 땅을 어떻게 다루는지, 무엇을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수박 겉핥기식이었지만 알 것 같았어요. 나와서 이웃 농부들에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운이 좋았던 건 김준권 전 정농회 회장을 만난 것인데 형님처럼 따랐어요. 정말 넓은 품을 지닌 분이었죠. 그 품으로 저도 품어 주셨고. 풀무원 농장에서 나와서 근처에서 5년을 농사를 지었는데 내 땅이 아니니까, 자주 옮겨 다니고 그래야 하니까 항구적으로 터 잡고 살 곳이 필요했어요. 살 곳을 찾다가 이곳 홍성으로 오게 됐죠. 그러고 나서도 농사로 자리 잡기까지는 5년이 더 걸렸어요.

 

홍성으로 귀농지를 결정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정농회 회원들이 전국에 있어서 여러 군데를 찾아다녔어요. 변산 공동체부터 창녕, 산청, 고향인 전라도까지. 고향은 조부모님이 절대 반대하셨죠.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어디가 모자라서 시골로 농사지으러 왔나 하는 이웃들의 시선이 두려웠던 것이겠죠. 지금은 그때 반대해주신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홍성으로 이사 온 건 98년도에요. 주형로 회장이 땅값이 싸다고 유혹해서 오게 됐어요. 정말 홍성이 전라도를 제외하면 제일 땅값이 쌌었죠. 지금이랑은 달랐어요. 또 풀무학교가 있기도 했고요. 이점은 아내가 원했는데 나중에 아이들 학교 보내기에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귀농 한 지 22년이 되었네요. 말하자면 홍성 귀농의 역사를 직접 목격하신 셈이에요. 귀농자의 추이, 변화가 있을까요?

지금은 딱히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잊지 않아서 최근의 귀농자들은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요. 초기 귀농자 대부분은 전업농으로 시작해서 겸업농으로 전환하는 형태였어요. 아내나 남편이 직장을 구하고 농지를 점점 늘려가다가 이제는 자신에게 알맞은 수준으로 줄였죠. 어떤 형태든 겸업농이 되었는데, 토박이나 대농이 아니면 피할 수 없는 귀농자의 운명이에요. 농사로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는 건 쉽지 않고 특히나 서울로 유학을 보내야 할 경우엔 더 그렇죠.

같은 귀농 1세대인 이환의 씨 같은 경우 농사로 자립하다 교육농 쪽으로 방향을 바꿔 귀농자들의 멘토가 됐어요. 귀농자를 지원하는 일을 제도화하기도 했고요. 저는 풀무학교 전공부를 통해서 청년 세대를 지원했던 셈인데 제가 관심 갖는 사람들이 청년 농부들이기도 해요.

 

왜 청년 농부들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가요?

제가 만나는 청년들은 주로 전공부 창업생(졸업생)들인데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를 잘 잡아가고 있고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토박이들, 전업농부들은 절대 감당할 수 없는 영역들을 청년들이 지키고 있고요. 농사꾼만 있어서는 농촌이 절대 유지되지 않죠. 그런 점에서 농민 기본소득 농촌주민 기본소득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일정 인구가 있어야 농촌이 유지되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하지요.

저도 과거에는 농민이라는 개념을 좁게 생각했어요.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는 사람만이 농민이라고 말했죠. 교조적이기도 했어요. 지금도 농촌에서 농사짓지 않는 청년들을 폄하하는 이야기들이 나오죠. 대단히 근시안적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모습은 다양할수록 좋고 그건 농촌에서도 마찬가지겠죠.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한 청년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봅니다.

 

기반이 없는 청년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기반이라고 하면 땅과 집 그리고 농기계, 인간관계가 있겠죠. 농사만 지어 가지고는 이런 기반을 마련한다는 게 불가능해요. 저도 학교에 들어가기 전엔 농사일 외에 출판 일을 받아와 일을 많이 했어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편집 일을 하고. 그래도 부족했죠. 저도 젊었을 적에 스승의 도움과 후원을 많이 받았어요.

겸업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번다고 해도 지금 청년농부들에겐 기반 마련이 어려울 거예요. ‘나는 안전한 농산물을 공급할 테니 나에게 후원해라 이렇게 내 뜻에 동의하는 도시에 사는 친인척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전공부에서 은퇴하고 마을에서 이장이 되셨어요. 어떠신가요.

다시 새로운 생활이에요. 학교생활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손이 많이 가요. 전에는 학생들을 돌봤다면 지금은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죠. 교통 이용, 각종 서류 처리부터 세탁기가 고장 나면 대신 AS를 부르기도 하고 농가의 소가 죽으면 함께 사체를 처리하기도 하죠. 정말 온갖 일들을 다 하고 있어요. 때로는 요양 보호사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활이라고 하셨는데, 여전히 농사도 짓고 계세요. 농사는 어떤가요? 여전히 의미 있고 재미있나요?

학교를 은퇴한 이후 농사가 더 재밌어요. 이전엔 시간에 쫓겼고 농사가 고달프다고 여겼어요. 특히 젊었을 땐 해야 된다는 당위로 일을 했고.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도 갖춰지고 아이들도 다 커서 경제적 압박이 없어요. 나가는 돈도 별로 없고 내핍이 생활화되어있기도 하고요. 유일한 사치가 있다면 책 사보는 건데 지금은 농번기라 책은 거의 못 보고 있어요. 그래도 농사 외에는 일이 없으니까 농사 자체를 느긋하게 즐기고 있어요. 농사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이구나 새삼 그런 생각을 합니다.

 

책을 못 읽고 계신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최근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있나요? 신작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아룬다티 로이의 <지복의 성자>를 추천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지금 온 세계가 아수라장이잖아요. 인도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힌두와 이슬람 두 종교 간의 학살, 계급사회에서 비롯된 갈등, 산업화. 작가는 책에서 양성구유자의 생을 통해 인도의 비극을 그려내고 있어요. 거기엔 농민과 성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연대의 시선도 담겨있고요.

지옥이 어디냐고 물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죠. 그런데 천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또 이 세상 속에 있어요.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듯 세상은 지옥이면서 동시에 천국이에요. 서로 보듬어 안아주고 타인의 고통에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사랑하고 연대하는 순간 천국이 펼쳐지죠. <지복의 성자>엔 이런 세상이 잘 표현돼있어요.

 

녹색당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요. 장길섭 당원에게 녹색당은 무엇인가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제 평생 있는 에너지를 다 퍼부어었던 일이 세 번 있는데 녹색평론 창간할 때 그랬고 풀무학교 전공부 창립 초기 10년이 그랬어요. 그야말로 온 에너지를 다 투입하고 전념했죠. 내 일이라는 생각으로 일했고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또 한 번 그렇게 전념했던 게 녹색당 창당 때였어요. 제 몫은 시작하고 만드는 일 같아요. 그것보다 더 어려운 건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일일 텐데 저에겐 어렵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지켜보게 됐어요.

어떤 조직이든 잘 운영될 때도 있고 쇠락할 때도 있지요. 부침이 있을 수 있어요. 꼬라지가 한심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만들어가야지요. 최근 녹색당을 탈당하는 당원들이 많았는데 안타까웠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간다는 건 조직을 대상화할 때 일어나는 일이죠.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참여해서 내가 주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쉽게 탈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녹색당 혁신위가 꾸려졌어요. 혁신위에 특별히 바라는 것이 있나요?

당원들이 이미 선출한 당직자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지, 사실 혁신위가 이해가 잘 가지는 않아요. 홍성에서도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장길섭 당원은 녹색당에 어떻게 참여하고 싶은가요?

사실상 저는 사회에서 은퇴한 사람입니다. 한발 물러나 있어요. 이젠 양가의 노인을 돌보는 것과, 우리 두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정도가 내게 남아있는 일이에요. 녹색당에서도 마찬가지죠. 지켜보고 응원하는 일이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창당 때는 후쿠시마 이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뛰어들었지만 막상 현실에 부닥쳐보니 건강한 조직, 정당으로 성장하게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여기엔 제 개인적 한계도 있었죠. 정당을 건설하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일에 나는 무능하다는 자각을 했어요. 이제는 젊은 세대들을 믿고 그들을 지지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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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홍성녹색당은

성 성장경제를 멈춰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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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색깔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당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모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