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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당당] 변화를위한서평단 (2023~매주 서평 홍주일보 연재)

너희가 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원한다, 윤찬솔 2026.08.13

보편적으로 통용될 만한 명제를 남긴 철학자들이라고 그 보편의 범주 안에 ‘모두’를 고려하진 못했나 보다. ‘플라톤은 결함 있는 아이들은 내다 버리라 했고, 칸트는 이성이 없는 존재들에게는 인격을 부여하지 않았다.’ 지적장애인들은 철학을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고병권은 ‘삶의 선생 노릇을 했던 앎의 대가들’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한다. ‘무능했고 유치했고 무례했다’고.

그가 처음 노들야학에서 철학 수업을 할 때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니체의 글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데, 말을 하는 사람도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본인뿐이었다. 장애인 학생들은 금방 집중력을 잃고 잠을 자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니체의 글 중 ‘신체’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비록 말은 아니어도 장애인 학생들의 역동적인 반응이 있었다. 장애인으로서 살아오며 몸에 축적된 경험이 그 말에 반응하여 입술이 떨리고 근육이 뭉치고, 어떤 이는 몸이 크게 뒤틀렸다. 이것도 어떤 ‘말’임에 틀림없다. 비장애인의 단정한 언어와 논리적인 문장으로 내뱉어진 음성은 아닐지 모르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다. 고병권은 다시 단호하게 말한다. ‘목소리가 없는 자들은 없다’고. ‘듣지 않으려는 자들’만 있을 뿐.
 

《묵묵》 고병권/ 돌베개/ 2018년 12월/ 12,000원

 

 

자문하게 된다. 나는 얼마나 타자에게 귀 기울이려 노력해왔는지. 억울하고 부조리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보며, 그 고통을 추체험해보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인과만을 생각한 것은 아닌지. 폭력은 타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기의 의사를 강제하는 행위. 줄곧 이렇게 생각해왔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말도 행동도 조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쩐지 좀 모자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는 것까지 폭력에 포함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일상에서 특별히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보다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목소리는 아닐지라도, 듣지 않는 것까지 폭력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김순석 열사. 이름도 처음 들었고, 열사로 불릴 만한 일을 한 것도 몰랐다. 그는 ‘1980년 서울’이란 시공간을 지나며, 그놈의 ‘턱’을 없애달라고 유서에 썼다.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만 합니까.”

이건 나의 입장이 아니다. 나는 사지 멀쩡하고 달리기도 곧잘 한다. 문턱에 발가락을 찧은 적은 있어도 이동에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다. 자기 입장의 테두리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일반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애당초 다수의 ‘일반인’에 맞게 세팅된 사회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점거 시위를 보며 ‘왜 잘못없는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러한 말은 ‘우리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들의 당연한 요구를 무시하고, 그들을 가두고 있는 사회시스템의 단단함에 일조한다.

저명한 철학자들마저 그 한계를 노출했듯, 배제가 쉽다. 그리고 배제의 역사는 깊다. ‘쓸모없는’,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는, 그래서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 그저 비용으로만 여겨지는 사람들이 여러 ‘시설’에 갇히고 죽어갔다. 일제 시기부터 1982년까지 안산의 선감도에서 ‘부랑아’들을 가둬두고 ‘교육’하던 선감학원, 지금도 존재하는 정신장애인 수용시설, 독일의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간 유대인들, 유대인들 이전에 학살당한 6만 명의 정신질환자들이 있다. 그리고 다 알 수 없는 숱한 역사가 있을 것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배제당한 이들이 목소리를 낼 때 듣게 되는 말은, 아마 이와 같은 종류일 것이다. 더 크고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으니, 그런 사소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말.

지금은 부국강병의 오랜 꿈이 모든 이야기를 집어삼키는 것 같다. 얼마 전 대통령이 ‘대체불가 대한민국’을 선언하며 발표한 3대 메가프로젝트(AI, 반도체, 데이터센터). 근저에는 그놈의 ‘현실주의’가 있을 것이다. 약육강식의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심지어 지금은 기술패권에서 앞서가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데, 기왕에 디지털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는 한국이 지금의 반도체와 AI 호재에 힘입어 옛 선진국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지 않나 싶다.

여기에서 지워지는 것이 있다면 3대 메가를 떠받치는 전력 인프라다. 그것을 어디에 지을 것이며 어떻게 전력을 보낼 것이며 하는 일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고 했던 밀양에서의 말들은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다. 전력 수요는 앞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남들은 다 앞서가는데 우리만 뒤처지면 되겠느냐는 따위의 말 앞에, 그럼 당신이 그 ‘소’가 되어보라고 소리치고 싶다. 웅웅거리는 전자파 소리와 물을 끌어오는 모터의 굉음이 자기에게만 닿지 않으면 그만인 것일까? 

전력 인프라를 위해 속도전을 말하는 지금의 정부가, 눈에 보이는 폭력은 없다 하더라도, 개발독재정권과 얼마나 다른지 잘 모르겠다. 남자가 여자를, 제국이 식민지를, 인간이 자연을, 도시가 시골을, ‘일반인’이 장애인을 착취하고 배제하는 동일한 폭력의 구조에 진절머리가 처진다. 나 역시 거기에 속해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약자가 강자를 동경하는 것은 같은 힘의 기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약자가 힘과 가치에 대해 완전히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면, 열등감이나 박탈감을 가질 일이 없다. 그러니, 들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해야할 말은 이런 것인지 모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나는 너희가 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원한다. 너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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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원한다 - 홍주일보

보편적으로 통용될 만한 명제를 남긴 철학자들이라고 그 보편의 범주 안에 ‘모두’를 고려하진 못했나 보다. ‘플라톤은 결함 있는 아이들은 내다 버리라 했고, 칸트는 이성이 없는 존재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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