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온 지 10년이나 됐지만, 농사 혹은 농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신비화된 이미지 같은 것들이다. 농사를 짓는 친구들, 이웃들에게서 구체적인 고민과 생활을 듣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 최근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복잡한 인간으로서의 농민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벌써 몇 주 전의 일이다. 우리 마을의 한 회장에서 강승규 국회의원의 의정보고회가 있었다. 내란 시국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호기심이 생겨 참석한 참이었다. 예상을 빗나간 진행이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연설이 지나치게 길어져 어느새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만큼 홍성이 유기농 특구가 되기까지 농민들의 희생을 공치사하는 데 특히 긴 시간을 썼다. 의원의 독백이 이어지던 그때, 참지 못한 한 주민이 삭감된 농민 수당 예산안에 대해 질의했다.
의원은 답변 대신 주민을 회장 밖으로 끌어냈다. 농업을 향한 조금 전의 찬사가 빈말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끌어내”란 의원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뇌리에 박힌 장면은 따로 있었다. 농민을 어떻게 보호할지 묻던 주민을 향해 오히려 비난하고 질타하던 다른 농민들의 모습이었다.
강승규 의원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양곡관리법을 통해서 (정부가) 쌀 매입을 한다면 농민들이 계속 쌀을 생산할 것”을 우려하며 “많은 국민이 남는 쌀을 계속 사게 될 것”이라 말했다. 의원은 ‘농민’과 ‘국민’을 분리해 말하고 있었다. 그가 호소하는 대상이 농민이 아님은 분명했다.
내게 관심 없다고 저토록 분명하게 표명하는 자를 수호하는 풍경에 복잡한 기분이었다.

오카 마리 저/ 교유서가/ 2024년 3월/ 18,000원
《기억·서사》에 따르면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이 책은 ‘조국’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왜곡되는 내면의 풍경을 그린다. 개인의 소망과 경험 그리고 기억마저도 이 필터를 통해 변형되는데 이는 국가가 작동하는 동력이 된다. 자신을 처참히 소외시킬지라도 익숙한 맥락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비틀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서사의 힘이다. 저자는 이 강력한 필터의 이름을 ‘내셔널리즘-보편적 서사’라 칭한다.
문제는 개인의 의지나 열정과는 별개로 기준에 맞지 않는 인간은 서사에서 가차 없이 탈락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아코디언을 불며 모금 활동을 벌이던 상이병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 어머니에게 모금함에 돈을 넣지 않는 이유를 묻자, 부상당했다는 이유로 끝난 전쟁에 얽매여 ‘일하지 않는 사람’에겐 돈을 줄 이유가 없다는 답을 듣는다. 일본 사회가 고도의 경제 성장에 엄청난 기세로 매진해 나가고 있다는 서사 속에서 상이병은 (…) 누락돼 있는 사건의 존재를 증명한다.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않는 ‘국민’은 탈락해 이내 ‘타자’가 된다.
이 책은 타자와 난민을 동의어처럼 사용한다. 상이병의 일화처럼 보편에서 밀려난 ‘타자’는 조국을 상실한 ‘난민’과 같기 때문이다. 무리한 주장이 아니다.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그랬듯 ‘타자’ 앞의 국가는 ‘조국’이라는 허울을 벗고 그 민낯을 드러내곤 했다.
저자는 보편이라는 왜곡에 대항해 ‘난민적 정체성’을 획득하자는 결말에 이른다. 보편에 속하기 위한 투쟁에서 밀려나는 대신, 서사에서 벗어난 전복적 주체가 될 것을 제안한다. 어떤 이들에게, 특히 폭력적으로 보편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난민이 되자’는 결말은 다소 특권적으로 읽힐 위험은 있다.
그날 의정보고회에서 배포된 자료는 ‘레벨업 홍성’이라는 기치 아래 여러 개발 계획을 홍보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더 나은 곳’이 될까? 모자라고 부족한 농촌, 국가경쟁력 없는 농업이라는 서사는 누군가에겐 객관적 상태로 보일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지라도 지지하고 수호하기도 할 것이다.
난민이 되자는 말은 내게는 난해하게 들린다. 이 말은 국어라는 ‘국가의 언어’를 벗어날 때 비로소 이해될지도 모른다. 농민에 대한 신비한 이미지를 깨지 못하는 것은 농업과 동떨어진 내 위치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비밀스러운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소망과 경험, 기억은 보편 서사를 사는 우리에겐 전달되기 어렵다. ‘레벨’, ‘경제 성장’ 같은 언어로는 농민이 땅을 지키는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농민들은 보편에서 ‘밀려난’ 게 아니라 오카 마리의 꿈처럼 정말로 ‘벗어난’ 듯 보인다. 이 책의 결말을 그들을 통해 의미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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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이 되자는 말, 《기억·서사》를 읽고 - 홍주일보
농촌에 온 지 10년이나 됐지만, 농사 혹은 농민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신비화된 이미지 같은 것들이다. 농사를 짓는 친구들, 이웃들에게서 구체적인 고민과 생활을 듣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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