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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녹색당 논평, 칼럼

당원 릴레이 기고 17) 너무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신지인

 

나는 항상 지리산과 함께해 왔다. 내 태몽도 지리산 산군님이 나오셨고, 내 첫 지리산 종주는 5살 때였다. 고등학생 때는 매주 천왕봉까지 올라 다녔고 성인이 된 후 엔 잠시 가지 못했지만, 결혼 후엔 매년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다.

어렸을 때 지리산의 기억은 울창한 숲도 많지만, 몇몇 골짜기와 봉우리들은 맨땅이 보일 정도로 민둥 한 곳들이 많았다. 특히 심했던 곳이 천왕봉 바로 아래인 제석봉이다. 나무는 한 그루도 없고 풀도 잘 자라지 않아 공사장처럼 모래흙만 있었다. 제석봉을 지키고 있는 건 바위와 수십 년 전 죽은 구상나무 고사목뿐이었다. 천왕봉 일출을 위해 해뜨기 전 제석봉을 지날 때면 어린 마음에 섬찟하고 쓸쓸한 기분이 남곤 했다. 제석봉과 다른 민둥 한 자리들이 원래부터 척박한 곳은 아니었다.

불과 70년 전까지만 해도 사시사철 푸르른 구상나무로 뒤덮여 햇빛조차 잘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던 천혜의 숲이 벌거숭이가 된 것은 해방 이후 부패한 정치권력과 결탁한 벌목꾼들이 최상품의 지리산 구상나무를 베어다 팔았고, 시민단체의 활동으로 벌목을 할 수 없게 되자 화풀이로 제석봉에 불을 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수천 년을 살아오던 푸르른 숲은 그 앙상한 뼈대들로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다.

바다도 내게는 지리산과 마찬가지다. 한때는 김이 없으면 밥을 안 먹었다. 어머니표 조기조림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태안 기름유출이 터졌을 때 그 참상을 직접 눈에 담고 바다를 닦았었다. 제주의 맑은 바다에서는 피부가 타서 벗겨질 때까지 놀았다. 염전에서 놀러 가 소금 위에서 뒹굴고 짠 함초의 맛에 얼굴을 찡그리고 웃었다. 갯벌에서 넘어져 진흙 괴물이 된 채 조개를 잡고 파도에 금방 사라지는 모래사장의 웅덩이를 파며 즐거워했다. 서해안 바다 위에 누워 있으면 천국 같았고, 새끼 돌돔이 와서 맨살을 쪼아댔다.

그랬던 바다가 지리산처럼 험하게 다뤄져 망가질 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과연 대한민국에 살면서 바다와 단 하나의 관계도 맺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니, 이 지구에서?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과거에도 미래에도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데, 그런 바다에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독을 탄다니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다.

처음 일본이 오염수 방류를 결정했을 때 그 결정을 큰 국제적 반대에 부딪혔고, 나는 그 반응들을 보며 금방 일본이 계획을 철회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국의 땅에 쓰레기장을 만드는 수준이 아니라 온 지구의 생명이 공유하는 바다를 자기들 마음대로 쓴다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자. 제일 크게 반대해야 할 우리 정부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고, 시민들은 포기인지 무관심인지 10차 방류는 큰 이슈조차 되고 있지 않다. 첫 방류 소식에 온 국민이 모든 소금이 동냈던 일이 마치 꿈같다.

하지만 포기해선 안 된다. 어렸을 적 나는 제석봉은, 지리산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작년에 다시 지리산을 타며 내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세석평전은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가 크게 자라 숲이 생기고 있다. 돼지평전은 나무가 너무 자라 이젠 평전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표토층이 아예 벗겨져 회생 불가라고 했던 노고단은 색색의 꽃과 나무가 자라 빈 곳이 없었다. 바위뿐이었던 천왕봉에 사람들이 직접 흙을 조금씩 지고 올라와 잡초들이 자라기 시작했고, 등산로 곳곳마다 작은 구상나무가 자라고 있다. 제석봉에도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죽은 것만 가득하던 땅이 생명으로 가득 찼다. 더 이상 내가 알던 지리산이 아니다.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우리가 도와준다면 더욱 그렇다.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이제서 방류를 멈추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수 있다. 하지만 아니다. 지리산처럼, 제석봉처럼 우리가 행동하여 방류를 멈춘다면 바다는 돌아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2610

 

너무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지리산과 함께해 왔다. 내 태몽도 지리산 산군님이 나오셨고, 내 첫 지리산 종주는 5살 때였다. 고등학생 때는 매주 천왕봉까지 올라 다녔고 성인이 된 후 엔 잠시 가지 못했지만,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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