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홍성녹색당 주최/5월 29일 다문화도서관
2014년 4월 16일로부터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진상규명을 비롯해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세월호'라는 이름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홍성녹색당에서는 지난 5월 29일 '세월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진행했습니다.
세월호를 다시 한번 우리의 일로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좌담회에서,
네 분의 발표자와 풀무고학생들을 비롯한 참가자 30여명이
마음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얘기해주셨습니다.
소박한 자리였지만 세월호가 우리들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기억해나가야 할지를 고백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지도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지키는 첫걸음은
세월호를 여전히 자신의 일로 여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홍성녹색당에서는 세월호 참사를 우리의 일로 다루어 나가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생각하며
장윤호(고등학생)
2014년 4월 16일, 그날로부터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참혹하고 잔인한 날들을 지나왔고,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은 날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가 가라앉던 그 날, 저는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행선지는 제주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수학여행 가던 배가 가라앉았다’며, 세월호의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제가 세월호를 마주한 첫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금방 다 구하겠지.’하며, 곧 모두 구조된 모습을 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구조를 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안 한 건지, ‘전원구조’ 소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세월호도, 사람들도 바닷속으로 가라앉기만 했습니다. 모니터 화면 속으로 보이는 세월호, 그 안에 사람이 있는데 그 배가, 그 속에 갇힌 사람들이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배에서 단 한 사람도 구조되지 못하고, 304명의 삶과 생명이 영영 가라앉아버렸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문득, 내가 저 차가운 바닷속, 배 안에 갇혀있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뒤집혀버린 천장과 바닥, 나갈 수 없게 된 문, 차오르는 물, 차가워지는 몸,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친구들……. 내 눈앞의 벽들이 그 친구들을 가둔 벽이 되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허우적거리는 물이 되고, 내가 느끼고 있는 온기가 끔찍한 냉기로 변했습니다. 내가 그 속에 갇혀 죽었다면, 우리 엄마 아빠는 어떻게 견딜까. 그 친구들은 얼마 전 설레는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배 속에서 죽어간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 친구들, 부모들…….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들이 느꼈을 공포와 비통이 저에게 밀려왔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람들은 왜 구조되지 못했을까? 그전에 배는 왜 침몰했던 것일까? 어째서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대체 유가족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탄압받고, 모욕당하는 것일까? 세월호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찾아볼수록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저 컴컴한 바닷속에 치명적인 진실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무지 운행해서는 안 될 배가 출항했다는 것, 배와 부딪혔다는 이상 물체와 명확하지 않은 침몰원인,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또는 다른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던-해경과 정부, 세월호의 실소유주가 국정원이라는 증거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세월호 참사는 ‘우연한’ 비극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세월호 참사는 국가와 기업에 의한 ‘살인’입니다. 맹목적이고 탐욕스럽게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 그런 기업에 예속된 채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추구에 몰두하는 정부 관료들과 권력 엘리트들, 이들이 304명의 삶을 수장시켰습니다. 이들은 남을 짓밟고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저는 이것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렇게 짓밟힌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뿐만이 아닙니다. 독재정권 시절 숱하게 있었던 탄압과 폭력, 가까이에는 밀양과 청도, 4대강,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강정의 해군기지와 대추리의 미군기지, 그리고 지금도 핵발전소로 고통받는 모든 지역의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대한민국의 온 천지에 고통에 찬 이들의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사건들은 모두 별개의 일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그릇 되다는 증거로서, 한꺼번에 불거져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많은 일들도, 생명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 경제성장과 자본주의라는 이 시스템에서는 결국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숱한 비극 중 하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봤을 때 앞에서 이야기한 일들은 모두 같은 문제이고,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세월호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다.’ 같은 말들은 단순한 비유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드러낸 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세월호를 통해 목격한 것은, 바로 무너지고 있는 저 자신의 삶이었습니다. 저 바닷속에 가라앉아있는 것은 이 사회와 국가 전체였고,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이 진실을 목도하고 나니, 세월호 참사 그 자체보다도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은 세월호를 통해 드러난 생명보다도 철저히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민낯과 그 속에 자리 잡은 위태로운 저의 삶이었습니다. 저와 세월호에 관해 이야기하던 친구는 ‘목숨이, 생명이란 것이 우습게 되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삶을 짓밟는 이 사회,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저의 삶이 위태롭게 느껴집니다. 앞으로의 날들이 기대되고 설레기보다, 걱정스럽고 두렵습니다.
이제는 비행기도, 기차도, 버스도 안심하고 탈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핵발전소는 어떤가요?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국가와 자본의 무능력·무책임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핵발전소는 과연 얼마나 ‘안전’할까요? 이 위험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적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그 날의 세월호에서만이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호’ 전체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몇 주 전, 수업시간 중 한 선생님이 세월호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수업시간 중 세월호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한 선생님은 그분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밖에는 세월호가 수업시간에 다뤄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학교 교육 체제 속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는 공부 외엔 어떤 일에도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면서, 이후에는 대학에서, 또 그 후에는 직장에서까지, 평생을 “가만히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죽음의 선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가라앉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학생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학교 교실은 현재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대한민국호’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크게 울려 퍼지는 공간일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과 자립을 미루고 문제집 풀기에 열중하라는 것, 협동보다 경쟁하라는 것, 학교는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것, 사회 문제에 관심 갖기보다는 공부나 하라는 것……. 제게는 모두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들립니다.
‘내일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지금은 공부하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만, 그 말대로 한다면 저에게 과연 내일이, 미래가 있을까요?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가만히 있으면, 사회와 삶과 단절된 공허한 교실에 갇혀 서서히 가라앉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학교 교실은 제가 가장 먼저 탈출해야 할 선실입니다. 그리고 이 탈출이 사회의 항로를 바꾸는 데에 미약하게라도 힘을 보태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무지한 교실을 넘어 사회로 나아가, 내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치열한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세월호 참사 이후, 학생들끼리 〈녹색평론〉을 읽으며 공부하는 모임에 더욱 열중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사회에 대해 알고, 무엇이 나의 삶을 위협하는지, 거기에 맞서 어떻게 나의 삶을 지켜야 하는지 공부하는 일이, 지금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부를 통해 비로소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게 되었을 때, 나 자신이 내 삶의 선장이 되어 항로를 바꾸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할 때, 희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회의 항로를 바꾸는 일은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긴 호흡으로 내다보고, 준비하며, 싸워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준비 없는 희망>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를 잠시 읽어보겠습니다.
준비 없는 희망 -박노해
준비 없는 희망이 있습니다
부단한 정진으로 자기를 갈고 닦아
저 거대한 세력을 기어코 뛰어 넘을
진정한 자기 실력을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 없는 준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해가는데
세상과 자기를 머릿속에 고정시켜
현실 없는 준비에만 몰두하는 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 오늘과 내일, 행복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의 항로를 바꾸기 위해, 희망을 위한 준비를 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최정일(홍성녹색당 운영위원)
우울하고 마음이 무겁다. 딱히 세월호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무수한 패배,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 짐작할 수 없는 늪의 연속, 그런데도 아랑곳 않고 떠오르는 태양과 눈부신 나무들이 우리가 저질러 놓은 풍경을 말없이 비추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왜 모여 있을까? 재미나고 진기한 구경거리, 먹을거리가 지천에 널린 세상에 그런 풍요를 즐기고 누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왜 우리는 1년 전에 일어나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한 사건을 두고 여기 앉아 있는 걸까?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어떤 해답도 결말도 없는, 지배층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장기판의 졸처럼 쓰다 버린 한 사건을 생각해 왔다. 때론 촛불을 들고 때론 1인 시위를 하고, 우리 자신의 기억에서마저 희미해져가는 세월호를 호출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열쇠를 저들이 쥐고 있는 한 우리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아무리 외쳐 본들 그들의 귓가에 가 닿지 않을 것이다. 바짓가랑이 붙잡고 떼쓰는 아이가 제 풀에 지쳐 잠이 들 듯 우리도 언젠가 포기할 날이 올 것이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저들은 밀실에서 사건들을 꾸미고 있다가 불리한 상황에서 하나씩 꺼내 놓을 것이다. 한통속인 언론이 신나게 떠들어 때면 또 유야무야 잊혀지고 내가 뭐 어찌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에라 모르겠다 골치 아픈 정치 문제는 제쳐 두고 내 앞가림이나 신경쓰자며 가족의 안온한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힘들게 일하여 번 돈으로 쇼핑할 자유 밖에는 우리에게 어떤 자유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차곡차곡 저들의 지배는 관철되고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소소하고 개인적인 문제들로 벅차다.
왜 이렇게까지 흘러와 버린 걸까? 수 없이 많은 사건 사고가 있어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은 채 넘어가고, 수많은 권력층 비리가 생겨도 임시변통으로 때우고 저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뭐 나랑 상관없어 내 할 일만 하면 돼, 어차피 세상 일이란 항상 그래왔는데 뭘..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나와 관계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때론 분개하고 때론 신문을 보다 혀를 쯧쯧 차고 침을 뱉었을지언정 그걸 진정 나와 상관있는 일로 여겨 본 적은 없다. 세상 모든 게 거미줄처럼 얽힌 그물망이라는 것은 책 속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밀양에서 할매들이 옷이 벗겨져 경찰에 끌려가도 분개하는 마음 한 켠에는 밀양 시골 몇몇 곳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뭘.. 후쿠시마 사태로 방사능에 오염된 것은 일본 땅이지, 다행히 여기까지 안 왔어, 생선도 주기적으로 방사능 측정해서 공급하는 생협에서 파는 걸 사 먹으면 돼..
세월호 사건이 터진 그날 오전 나는 지인에게서 소식을 처음 들었다. 진도에서 무슨 여객선이 뒤집혔대요. 속으로 아이고 또 무슨 골치아픈 사건이 터졌구만, 몇 명 죽고 몇 명 실종되고, 또 매스컴에서 며칠 난리 피우다 시간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잠잠해 지겠지, 그러다 말겠지.. 숱하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런 사건 중 하나겠지, 그랬더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해경 구조선이 배에서 빠져 나온 사람을 싣는 동안에 창문을 깨트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아이들의 영상이 새벽 잠을 깨웠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단원고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그 배에 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저들이 세월호가 아닌 다른 배를 고를 수도 있었다. 지금은 세월호지만 나중엔 더 큰 사건일 수 있다. 우리 아이가 이 사건을 비켜간 행운을 언제까지 바랄 수 있을까? 이제껏 세상일에 분개하는 마음 한 편에 나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한 것이 옳았을까? 지금도 이 사회 곳곳에서 부당한 일이 되풀이되고 있고 이 세상 어딘가에는 파괴와 살육이 진행될 텐데, 그리고 그것들이 쌓여 흘러 넘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가 버릴 텐데..
시스템 자체가 저들의 지배를 돕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고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문제에 골몰하다 시간을 보내고 만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저들의 지배에 터럭 한 올 만큼의 균열이라도 낼 수 있을까? 아니 그건 제쳐두고서라도 어떻게 하면 나 자신만이라도 지켜낼 수 있을까? 저들을 현실 법정에 세우기기는커녕 뭣 때문에 내 새끼가 구조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저토록 속절없이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는지 그 이유라도 알고 싶다고 절규하는 유가족을 과연 무엇이 위로할 수 있을까?
띄엄띄엄 참석하곤 했던 목요일 세월호 촛불 집회에서 난 대체로 무기력했고 우울했다. 세상 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다짐해 보았지만 며칠 못 가 사그라들었다. 딱 한 번, 나는 밝게 솟아오른 적이 있었다. 세월호 1주기 추모 행사 말미에 풀무학교 전공부 문찬영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들고 다 같이 부르자고 독려하셨던 윤민석의 노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를 따라 부르며 박수를 치는 동안 이상하게도 가슴이 벅차오르며 희미한 빛이 떠올랐다. 나에겐 이때가 유일하게 지난 1년의 세월호 국면에서 내가 승리했다고 느낀 적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뿐 아니라 지금도 정부로부터 능욕당하며 길거리에 서 계시는 세월호 유족들에게도 이것이 소박한 단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실제로는 불의가 횡행하고 악이 선에게 승리하는 듯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치자들은 민중들을 가두고 고문하여 학살하고 갖가지 죄목으로 괴롭혀 왔다. 가해자는 법정에서 제대로 된 처벌도 못 받고 천수를 누리며 산 경우가 허다했다. 우린 숫자가 많긴 해도 힘이 없다. 그런 것도 모르고 상황을 바꿔보겠다고 촛불을 드는 우리가 바보 같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분별력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 세월호를 짓뭉개려는 저들도 이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눈으로 봐도 그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 그리고 불의에 눈감지 않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돌팔매를 던져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지난 달 서울 경동 교회에서 열린 세월호 추모 칸타타 제목은 「정의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였다고 한다. 어떤 현세의 처벌이 저들을 단죄할 수 없고 유가족들을 위로할 수 없다면 우리 마음 속 의로움을 갈망하는 정의가 위로할 것이다. 우리 마음 속 정의는, 그 정의만큼은 우리를 절망케 한 저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악행을 저지른 저들은 처벌을 피했다고 좋아하겠지만 모든 이들이 지니고 있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분별하는 우리의 본래적인 정의 관념이 가하는 단죄는 피할 수 없다.
너무 한가하고 관념적인 얘기라고 할지 모른다. 진상 규명을 소홀히 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저들의 논리를 따라 편리와 효율, 돈이라는 맘몬에 물들지 않고 우리의 소중한 정의에 대한 생각을 가꿔갈 수 있다면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세상은 우리 각자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군가는 풀이 죽고 물러설지라도 우리만큼은 세상의 지극히 작은 변화를 위해 생활 속 아주 작은 수준, 아주 작은 단위에서부터, 정성을 다해 임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무의미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선과 정의의 의미를 궁리하고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우리는 여기에 모여 있는 걸까? 세상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져가는 우리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 아닌가? 우리에게 숱한 기회를 주셨는데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인내심도 언젠가는 바닥날 것이다. 우리에겐 슬퍼할 권한이 없다. 나는 고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에 굴복하지 말자. 우리가 정성을 다해 하는 일이라면 이 거대한 세상 어느 한 귀퉁이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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