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옹호함, 장정우
농부에게 겨울은 더없이 소중하다. 지금이야 시설농사를 짓는 이들이 늘어 옛날에 비해 농번기와 농한기의 구분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추수와 김장을 마치고 다음 해 정월대보름이 지나 감자를 심기 전까지, 겨울은 여전히 농부들에게 달콤한 휴식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가는 요즘, 겨울다운 겨울을 보내지 못했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그 이유는 해가 바뀌고 시시각각 낮이 길어지며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 여전히 12월 3일 계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벌어지는 혼란은 멀리 떨어진 홍성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지난달 홍성과 예산에서는 지역구 국회의원인 강승규 의원의 의정보고회가 열렸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대통령과 계엄을 옹호하는 강 의원에게 주민들의 비판이 쏟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문제 제기하는 주민에 맞서 보좌관은 “의정보고회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입을 막고, 강 의원은 경찰을 부르는 등 정치가 실종된 모습을 보였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국회의원의 소심한 대응보다 내가 주목한 것은 해당 자리에 있던 국민의힘 소속 군의원들이 며칠 후에 “민주당 셀프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성명을 냈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참여한 두 번의 의정보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시민들은 이 정국에 민주당 의원들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며 성토했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거나 계엄을 비판하는 모든 이들을 민주당 지지자 내지는 이재명 지지자로 보는 모양새이다. 우리나라에 정당은 국민의힘과 민주당밖에 없고, 정치는 윤석열 지지 또는 탄핵 반대 아니면 이재명 지지 또는 탄핵 찬성밖에 없는 것인가.

정치와 정치 혐오가 동시에 범람하는 와중에 《정치를 옹호함》이라는 책을 만난 것은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극한의 대립과 소통 불가능, 나아가 정치 혐오에 빠진 한국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대안을 제시해 준다.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은 “정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며,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며 ‘민주주의’, ‘통치’, ‘독재’ 등과 정치를 구분하며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정치를 다시 정의해나간다. 그는 정치를 ‘행위’라고 규정하며 정치의 핵심은 ‘조정’이라고 강조한다. 서로 다른 배경과 이해관계를 가진 구성원들이 현실에서 직면한 구체적인 문제를 매일매일 조정해나가는 행위가 정치이며, 그 활동을 통해 실제 통치가 가능해야 하므로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의 발휘가 필요한 경우에 신속히 출현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41쪽) 즉, 선거 시기에만 주권이 주어지는 현실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에게 정치란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실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힌트는 ‘정치=조정’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있다. 조정이란 “끝도 없고 어렵기 짝이 없는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시도”다.(31쪽) 그렇다면 누가 끝도 없는 문제에 천착하며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일상적으로 할 수 있을까. 바로 당사자, 시민이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시민이 모여 우리나라 전체의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현실성도 떨어질뿐더러, 지속할 수도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민인 우리가 구체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물리적 거리, 즉 자치가 가능한 장소의 크기이다. “아주 작은 영토에서만,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자신들이 무엇에 참여하는지를 알 수 있다.”(96쪽)
지난 2월 9일, 홍성에서 ‘읍·면 자치권 확보를 위한 집담회’가 열렸다. 실종된 정치를 되살리고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이들은 ‘읍·면 자치권 확보를 위한 풀뿌리 공동행동(약칭 읍면자치공동행동)’을 발족했다.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이 틈을 타 대전-충남, 대구-경북 행정 통합과 같이 우리에게서 정치를 더 먼 곳으로 탈취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한 집단의 자유는, 그들의 힘과 존재가 부인되지 않고 실제로 그들이 가진 힘과 존재만큼 국가 안에서 인정받을 때에만 성립한다.”(46쪽) 우리의 자유를 위해 정치를, 자치를 다시 보자.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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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옹호함 - 홍주일보
농부에게 겨울은 더없이 소중하다. 지금이야 시설농사를 짓는 이들이 늘어 옛날에 비해 농번기와 농한기의 구분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추수와 김장을 마치고 다음 해 정월대보름이 지나 감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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