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소소당당] 변화를 위한 서평단

벼농사의 의미, 장정우

인어 2024. 10. 31. 22:28

얼마 전 갓을 두르러 가다(벼를 수확할 때 기계 작업이 어려운 모퉁이의 벼를 손으로 베어두는 작업) 이웃들과 함께 참을 먹은 일이 있었다. 맨 처음 벼를 베주기로 한 콤바인을 기다리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참을 드시고 있었다. 그러다 지나가던 이웃 아저씨가 눌러앉고, 저 멀리 지나가던 나와 아버지가 붙잡히고,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함께 쉬자며 막걸리 한 병 챙겨서 온 아저씨까지. 논을 바라보며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경험과 별개로 벼 수확이 한창인 농민의 표정은 밝지 않다. 작년 이맘때에는 쌀값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쌀값이 20퍼센트가량 떨어지고, 벼멸구로 인한 피해도 큰 데다가 수확을 한창 해야 하는 시기에 이틀 동안 내리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어떤 사람은 쌀 소비가 계속 줄어드는 와중에 벼농사를 계속 짓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며 벼농사를 ‘좀비 농사’라고 비꼬기도 한다. 나(벼농사를 짓는 농민)는 필요하지도 않은 쌀을 멋대로 생산하고 정부에게 책임지라며 생떼를 쓰는 사람인가. 하지만 얼마 전 논둑에 둘러앉은 나와 농민들은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공통의 무언가를 느끼며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고 있었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자신의 대표작 《공간과 장소》를 통해 ‘장소애(場所愛)’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공간과 장소라는 용어를 구분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공간은 정의와 의미가 더해짐에 따라 장소로 변모해 가는데, 쉽게 말해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그곳은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공간과 장소 그리고 장소애라는 개념만큼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의 전반에 걸쳐 공간이 장소가 되어가는 과정, 장소가 갖는 의미, 장소를 안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등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설명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었다. 책의 말미에 이르러 저자는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알고 있는 것의 전부라고 믿어버린다”(366쪽)며 수치나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경험의 깊이를 망각하는 것의 해로움을 이야기한다.

 

벼농사나 농사의 부가가치를 언급하며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것 역시, 드러나는 데이터만을 고려하고 그 경험의 깊이를 망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신들의 땅과 관계 맺어왔고, 나아가 벼농사는 농민 개개인을 묶어주는 공통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나’의 장소를 ‘우리’의 장소로 확장할 수 있게 했다. 실제로 업무차 타 지역에 가서 주민들과 이야기할 때면, 벼농사를 짓는다고 이야기하기 전과 후의 대화가 질적으로 달라지는 경험을 자주 하곤 한다. 즉, 벼농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수치화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존재하는 농촌에 대한 공통된 경험을 제공하고, 나아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공통된 장소애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논의 면적은 계속 줄고 있으며, 고령화로 인해 벼농사를 짓는 농민도 함께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쌀 소비량과 생산량의 균형이 맞춰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삶과 애착이 녹아든 장소에 살던 사람들의 감소를 뜻한다. 현재 지역 곳곳에서 농촌 소멸을 앞세워 추진되는 골프장, 산업단지, 고속도로 등의 개발 행위들은 오히려 농민을 지역에서 뿌리 뽑는 행태를 가속할 뿐이다. 오늘날 (지역민의 경험이 무시된) 납작한 논리 속에서 진행되는 농촌 난개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전 세계 곳곳에서 지역을 장소로 만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린 이 책은 외부의 공간 전문가가 아니라 벼농사를 짓는 농민을 비롯해 이 장소에 뿌리내리고 사는 우리의 경험을 믿으라고 이야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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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의 의미 - 홍주일보

얼마 전 갓을 두르러 가다(벼를 수확할 때 기계 작업이 어려운 모퉁이의 벼를 손으로 베어두는 작업) 이웃들과 함께 참을 먹은 일이 있었다. 맨 처음 벼를 베주기로 한 콤바인을 기다리던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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