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모임에 나가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 각자 쓴 원고를 낭독하고 감상을 나눈다. 이번 달엔 《이 책은 신유물론이다》를 읽고 서평을 써갔다. 내 차례가 돼 가져간 글을 읽었다. 이상했다. 분명 나름대로 정리를 마친 글이었는데 소리 내 읽으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낭독을 마치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동료들도 나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관념, 실재, 인식, 유물론, 사변, 얽힘의 관계, 심미적 몽상… 1700자 정도의 짧은 글 안에 이 모든 단어가 우겨져 있었다. 이 책은 교양철학서다. 책도 얇고 친절한 말투로 쓰여져 있지만 개념과 용어들이 생소해 이해하는 것도, 재료 삼아 글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평은 책을 소화하지 못한 포화상태 그대로였다. 동료들은 개념들을 풀어 쓰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내 언어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었다. 다시 책상에 앉았다. 단어들을 하나씩 다시 살펴봤다. 고칠 수 있을지 막막했다. 대체할 수 있는 고유의 생각이나 경험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유물론의 물질관에서는 인간, 비인간 그리고 사물까지도 모든 존재는 독립적이지 않고 “얽혀”있다. 그래서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국 “좋은 관계”다.(180쪽)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실재와의 부족한 연결 때문에 실패했다는 점은 그래서 되돌아볼 부분이었다.
실재보다 관념이 앞설 때 현실에선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주위에 널린 흔한 예로는 성역할이 있다. 관념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 중요해지는 현상은 신유물론자들의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한 단락 정도는 외부와의 관계가 드러나 좋았다는 평을 받았다. 자주 가는 산책로에 대해 쓴 단락이었다.
“…우리 집 뒷산에 닥친 변화도 그랬다. 우리 마을 그리고 두 개의 다른 마을과 연결된 이 작은 산은 참나무를 중심으로 안정된 활엽수림이 형성되어 있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워 주민들이 산책로로 이용하는 곳이었는데 어느 날 숲길 한 구간이 훼손되었다. 나무들이 모조리 뽑혀 나갔다. 바위들로 축대가 쌓이면서 지형이 바뀌더니 붉은 흙이 덮이고 일제히 소나무가 심겼다. 자갈과 야자 매트로 길을 깔아 양옆에는 원예종 꽃들이 대량 심어졌다. 그리고 ‘힐링 숲길’이라는 팻말이 붙었다. 숲이 사라진 자리에 관념을 재현하는 복사본으로써의 ‘숲’이 생긴 것이다.”
이 단락을 다시 읽으며 단어 카드로 사물을 익히던 조카 생각이 났다. 많은 아이가 그렇듯 조카도 아이였을 때 무엇에든 “왜?”를 묻길 좋아했다. “(단어 카드의 그림을 가리키며) 이건 포크레인이야”하고 알려주면 “왜?”하고 묻고, “이건 코알라야” 하면 또 “왜?”하고 되물었다. 그런 아이가 귀찮아져서 “그건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지 이름에 ‘왜’는 없어”하고 대꾸하곤 했다. 조카가 궁금했던 건 이름의 기원 따위가 아니라 이름-관념 뒤의 ‘실재’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히 나와 다정한 교감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관념과 실재의 관계는 내가 책을 통해 짐작하며 쓴 것보다는 훨씬 미묘했다.
아이는 어떤 물체의 실물을 처음 보고도 단번에 카드 이미지와 연결해 이름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관념과 실재는 서로 반대 개념도 아니고 딱 잘라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 단락의 배경인 ‘힐링 숲길’에 갔다. 늦봄 이후 거의 출입하지 않았다. 공사 이후 2~3년 정도 됐다. 공사 초기엔 원예종 나무와 꽃이 나머지 숲과 어우러지지 않았고 빈 공간이 많아서 황폐한 인상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현재는 야생의 풀과 나무들이 많이 침투했다. 다년생 초화들도 많이 번식해서 빈 공간도 없다. 본래의 숲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지만 다른 숲길과 명확했던 경계는 흐릿해진 상태였다. 무리지어 핀 원예종 꽃들도 아름다웠다. ‘실재’의 숲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관념’의 표상으로 이 장소를 예로 들었지만 이곳은 실재하는 땅이었다. 각종 야생초가 찾아와 자라나고 걸을 때마다 메뚜기떼가 튀어 올랐다. 귀뚜라미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 곳을 숲이 아니라고 부를 이유도 없었다. 서로 작용하고 관계하며 실재하는 ‘숲’이 되고 있었다.
독서는 아직 내 몸에 없는 것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고, 그것에 대해 눈으로 읽는 몸의 경험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물체를 관념으로 상상하며, 손가락을 움직여 서평을 쓴다. 이 책으로 서평을 쓰는 일은 내 경험과 이해의 폭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복잡한 개념 뒤로 빈약한 내면을 가려보려는 허영심을 발견하기도 했다. 물질은 생동하고 살아있다는 신유물론의 주장을 담은 이 책을 읽고 쓴 경험은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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